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데이라 제도 (문단 편집) == 역사 ==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가 지브롤터 해협 밖에서 페니키아인이 발견한 사실이 있다고 언급한, ‘나무가 많고 비옥한 섬’이 바로 이 마데이라 섬일 거라고 비정하는 역사가들이 상당하다. 로마인의 기록에도 위치 및 지리적 묘사로 볼 때 마데이라 섬으로 짐작되는 섬의 기록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섬은 1419년(포르투산투 섬) 및 1420년(마데이라 섬) [[항해왕자 엔히크]]의 명을 받은 주앙 곤살브스 자르코 휘하의 포르투갈 탐험대가 다시 발견할 때까지는 무인도였다. 이들이 포르투산투 섬을 발견한 계기는 폭풍으로 인한 조난이었는데, 돌아가서 포르투산투 섬의 존재와 이 섬 근처에 안개에 가려서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훨씬 큰 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왕자에게 보고하면서 이듬해부터 탐험이 시작되고 사람이 사는 섬이 되었다. 즉 포르투갈 최초의 해외영토인 셈. 다만 135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만든 나침지도에 [[아조레스 제도]] 및 마데이라 제도로 짐작되는 섬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어 이전에 중세 유럽인의 탐사가 행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10세기에서 11세기 당시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쥐]]의 유골이 마데이라 제도에서 발견된 바 있어서 이 쥐의 DNA를 고고학자들이 분석해봤는데, 확인 결과 이 쥐는 북유럽에서 유입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이 무렵에 [[바이킹]]이 마데이라 제도에 상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왜 [[포르투갈인]]의 도래 이전에 이 섬으로의 이주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마데이라 제도의 이름인 마데이라는 [[포르투갈어]]로 '나무'를 뜻하는데 발견 당시 섬에는 나무가 온통 울창하게 우거져 정착지를 건설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탐험대가 불을 질렀는데 이 불이 꼬박 7년간 꺼지지 않고 계속 탔다고 한다. 탐험대가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인판테 동 엔히크|엔히크 왕자]]가 섬의 토질이 [[숯]]처럼 목탄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섬에 포도를 재배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후 섬은 이름난 와인 산지가 되었다. 다만 초기에는 당시만 해도 값비싼 사치품이었던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사탕수수 재배에 드는 노동력이 상당했기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데려와 부려먹었는데 혹독한 노동으로 인해 노예들이 죽어나가면 아프리카에서 계속 노예를 사오는 방식으로 보충했다. 신대륙 발견 이후 카리브 해의 여러 섬들 및 브라질에 점차 대규모의 사탕수수 농장이 생기면서 17세기 이후 섬의 주된 산업은 와인 생산 쪽으로 옮겨갔다. 19세기 초 유럽 대륙에서 일련의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지자 [[프랑스 제1제국|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대영제국|영국]]이 2차례에 걸쳐(1801~02, 1807~14) 마데이라를 점령했는데, 당시 마데이라에 주둔했던 [[영국군]] 상당수(약 2천 명)가 이 섬에 매료되어 눌러앉는 것을 선택했다. 19세기부터는 특히 요양지, 그리고 관광지로 유럽에서 이름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이 섬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마지막 [[카이저|황제]]였던 [[카를 1세]] 역시 퇴위 후 망명하여 이 섬에서 여생을 보냈다. 마데이라 제도의 다른 유인도 포르투산투 섬의 경우 발견 당시 [[용혈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나 포르투갈 사람들이 수액을 마구 뽑아쓰는 바람에 죄다 고사해버려 토양 유실이 심해진 데다가 멋모르고 토끼를 풀어놓는 바람에 섬의 식생이 초토화되었다. 덕분에 섬이 모래투성이가 되어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려워졌고 아랍이나 프랑스 사략선들이 이따금씩 쳐들어오는 통에 고생하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어느정도 자연이 회복되었지만 섬 발견 당시와는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